세계보도사진전
세종문화회관
8.3-9.4


_시체는 웬만해서는 TV나 신문에 등장하지 않는다. 쓰나미로 익사한 사람이 수만명이고 이라크의 민간인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간다 해도, 그 사실들이 시각적으로 매스컴에 노출되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사실을 문자나 숫자로써 안다는 것은 그것을 ‘정보’로써 대하고, 사실에 대해 인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확인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이성적으로 인지하던 것들이 ‘인간적인 문제’가 되어 심정적인 동요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배우자의 불륜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것과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것의 심리적 임팩트의 차이이다.) 그런 면에서 이 전시의 사진들은 솔직하다. 어린 아이의 잘린 팔이 꿰메져 있고, 쓰나미로 폐허가 된 현장에는 시체가 나뒹군다. 카트리나의 피해로 죽어있는 ‘미국인’을 단 한 번이라도 뉴스에서 봤던가? 하지만 여기엔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플로리다의 시체가 있다.


_조금은 상투적인 질문 하나; 종군기자가 죽음의 위협에 놓여 있는 아이를 봤을 때 그 아이를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진을 찍어야 하는가?


_보도사진, 어떤 사건을 보도publication한다는 사진들, 그렇다면 관람객들은 세계의 지금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왔을까? ㅡ 이 사진들은 그 비참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각적 쾌를 준다. 사진들이 다루는 것들; 전쟁으로 구멍이 난 아이의 머리, 실제 시체들 등등, 그것들은 조금은 진기하고 기괴하며, 때문에 보통의 시선이 ‘탐하는’ 이미지들이다. 그런 작용 속에서 사건은 그저 스펙터클이 될 뿐이고, 정보의 전달이라는 미명하에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자는 전쟁사진이 포르노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_사진의 기능에 연유한 문제들로 전시를 평가할 생각은 없지만, 아니 어쩌면 그것은 사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 시선의 작용에 관한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보도사진이라는 것이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아마도 실제와 시각적 쾌의 거리에 있는 것 같다. 쓰나미 때문에 논 한 가운데 떨어진 범선의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대 그 자신의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때문에 마치 신비롭고 기괴한 SF영화라도 보듯, 관람객은 관찰적인 태도만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무의식적인 ‘가르기’는, 심하게 말하자면 ‘사진 속의 사실’을 일종의 ‘픽션’으로까지 치환하는 듯하다.


_그리고 이 전시의 사진들은 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좀 더 위에서 말한 거리 문제를 가중시킨다. 그 수상이라는 것들은 아마도 좀 더 미학적으로 훌륭한 사진들에게 간 것 같고, 미학적으로 가치 있다는 것은 조금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과는 동떨어져 있거나 별로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이고, 때문에 실제와 시각적 쾌의 간격은 여타 보도사진들보다 더욱 크다. 사진은 너무 아름답지만 사건은 너무 비참한 것이다. 그리고 그 괴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의 시선은 쉬이 시각적 쾌에만 집중을 하고 비참에게는 괄호를 씌워두는 것 같다.



_snake's_foot; 개인적인 생각으로 세계의 비참을 다루는 보도사진이라면 한 200만 화소짜리 디카로 구도도 하나 없이 러프하게 찍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의 미학적 가치를 최대한 낮추어야 그 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마치 영화 <오아시스>나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의 카메라처럼.

_snake's_hand; 세계보도사진재단이란 네덜런드 황실 후원의 ‘비영리 재단’이라는데, 작품도 몇 점 안되는 디지털 프린트 인쇄물인데, 사진 설명글 번역 또한 A4로 출력해서 테잎으로 붙여놓았을 뿐인데, 심지어 에어컨도 잘 나오지 않아 더웠는데, 어떻게 입장료는 '8000원'일까. 세종문화회관이 영리단체였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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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4 04:06 2006/09/04 04:06

정수진 개인전


2006.7.5-2006.8.6
http://www.ararioseoul.com/

_한국의 사치 컬렉션을 표방(!)하는 아라리오의 서울 갤러리 완공 후 첫 한국 아티스트의 개인전.

_공상에 대해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미에 대한 공상을 하지만 그 공상이 지속되다보니, 오히려 의미는 사라지고, 형상만이 남은 공상이라는 것. 그렇게 정수진 회화의 특이점은, 의미를 사유하다보니 순수한 형상figure만이 남았다는 것. 기호의 순도 높은 응축이 예술품이라는 들뢰즈의 말처럼, 현대의 미술이란 의미 그 자체이기 쉽지만, 그 중 보기 드물게 구상figuration이 아니라,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예술에서 희망을 거는) '형태'의 순수한 본질figure에 집중한다는 것. 물론 그것은 의미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우연적이고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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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5 13:20 2006/07/25 13:20

박이소 유작전



_이름없는 도시가 세계를 구성하고(<드넓은 세상>), honesty가 골판지 상자 속 어디선가 흘러나오고(<뒤를 돌아보지 마라 ­ 정직성>), 평생 '마이노리티'였던 그의 섬세한 care는 어쩐지 눈물을 자아내는 미학이다.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거대한 외침의 echo는 코웃음과 절망으로 들린다. "Minor Injury(그가 뉴욕에서 만든 문화공동체)"를 얻었다지만 그 injury는 언제나 그에게 있어 major하고 serious한 것들이었다. 기존 예술제도권에서 벗어난 시각과 재료들로 유지하는 시니컬한 시선은 그들에게 위약한 자신들을 방어하는 훌륭한 무기가 된다.




_flaw; 설치 작품의 대다수가 직접 작가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생전의 그의 스케치만을 보고 사후에 재제작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설치 미술의 경우에서는 배치나 조명 등 작은 요소들이 큰 차이를 만드는데도, 작가와 제대로 대화도 하지 못하고 제작이 되었을 이번 전시의 경우, 박모씨가 살아있다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수도 있다는 것. 게다가 작품의 소유권 문제가 불분명한 시기에 로댕이라는 메이져급 미술관이 그의 전시를 연다는 것은 뭐랄까 나중에라도 작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께름칙한 무언가가 있기도 하다.

_허나 그래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렇게라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 미술판에 속해있지 않은 나같은 한량에겐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 로댕은 그리 크지 않은 갤러리이기에 한 삼십분 돌아보고 나오려 했던 계획이었으나 전시를 보기 시작하고 나는 구십분이나 그곳에 매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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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2 13:39 2006/05/02 13:39


로버트 인디애나 전
서울시립미술관


_그저 몇 개의 숫자를 갖다 놓은 것. 그저 몇 개의 단어들을 갖다 놓은 것. 그 숫자들과 단어들은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이나 기억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형식은 퍽이나 ‘팝’스럽다. 단순하고, 명료한. 생각해보면 눈이 즐거울 것 없는 그런 간결한 형식으로, 자신만만하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배짱이 부러웠다. 나도 내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지만, sheffield's 36th처럼, 인디애나보다 좀 더 유혹적인(?) 형식으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안 알아줄 것이기에,

_어쩌면 ‘배짱’만은 아니고, 그 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세상이 알아줄만한 명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가 그런 명성을 얻은 연유는, 아마도 많은 부분, ‘들’이 인기를 얻었기 때문일 것. 이 LOVE를 기획했던 때는 베트남 전쟁과 68운동 등, 그 LOVE라는 단어가 너무나 절절하게 다가오던 시절이었다. 구성 또한, 당시 한창 이목을 집중하던 Pop art의 느낌을 따랐다. 색과 도안뿐인 형식의 빈약함에도 그렇게 ‘living legend(전시 제목)’이 되었던 이유, ‘때’가 너무 절묘했다고 밖에는.

_하지만 그의 LOVE는 21세기에 다른 의미로 다시 한 번 절절하게 읽힌다. 점점 그 단어의 의미가 무색해져가는 시기이기에. 미술관 1층에 놓인 12피트 높이의 그 큰 단어를 접하는 것은 무언가 아릿한 경험이다.

_‘단어words계의 대지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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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1 03:17 2006/04/01 03:17

_그의 말처럼 그저 측은함만은 아니다. '산다'는 것의 다양한 모습을 본다. 몸의 움직임이 물질에의 보상이고, 죽음이 가깝고 그만큼 삶이 가깝다. 정말 '산다'는 것이다. 출렁인다고 할 때, 그 말이 주는 만큼 밝고 경쾌한 느낌을 빼고, 단순히 어떤 운동적인 것을 나타낸다면, 사람이, 삶이 '출렁이는' 모습을 보다.





_사막의 모습이나 남미의 고산지대; 빛의 사용은 퍽이나 회화적이다. 기름에 번들거리는 작업복과 숲속에서 빛나는 원주민들; 인물과 구성은 때로는 초현실적이다. 사진이 내포하는 의미나 메시지를 거세하고라도 그것자체로 너무나 매력적인 이미지들이다. 당장에 드는 느낌은 너무나 갖가지 설치와 조명과 배우로 찍은 사진들인 것만 같다는 것이다. 그저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이미지의 갈고리.



_이 둘이 내내 엉거주춤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처음다가서는 이미지는 너무나 형형한데, 그래서 발을 떼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네임택을 보면, 그저 어딘가의 어떤 상황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형이상적이고 멋드러진 제목을 붙여도 너무나 잘 어울릴 것만 같은 사진이, 그저 어디어디의 노동자들, 어디어디의 난민, 그런 식. 그 순간 이미지의 생동에 취해 잊고 있었던 '사실'의 커다란 무게가 다가온다. 그 현실이라는 것은 눈의 기쁨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는 순간이라, 더욱더 큰 명도를 두고 되돌아온다. 그러면서 단순히 그들이 사는 삶의 고단함이나 슬픔들을 생각하기엔, 지금 보는 것이 너무나 아름답다. 사진이 찍힌 현실을 생각하기엔 이미지의 아름다움이 너무 강하고, 이미지의 아름다움만을 바라보기엔 현실의 무게가 너무나 크다. 보통은 어느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 대개인데, 이번은 그렇지가 못하다. 단 한번도 그 둘을 어떻게 섞어야 할지 고민해본적이 없기에. 브라질 북동부에서는 아기가 죽으면 눈을 감기지 않는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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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3 20:12 2005/08/23 20:12


<바스티유>

Jean Baudrillard, 1929~

대림미술관.
2005년 05월 25일 - 2005년 07월 17일
오전11시~오후7시(매표마감시간 6시30분, 월요일휴관)
http://www.daelimmuseum.org/

_브레송에게서 느낄 수 있는, 순간을 절묘하게 채취한 것 같은 느낌이라기보다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을 것 같은 무언가를 오랫동안 생각해서 차분하게 담아낸 것 같은 사진들. 물론 사진에서 읽을 수 있는 정황들에서는 리오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걷던 와중 쉽게 누른 셔터들 중의 하나처럼 보이긴 해도. 때문에 내 눈에는 사진이라기보다는 구도와 색을 고민하고 고민해 조금은 은유적인 느낌도 가미한 어떤 '회화'처럼 느껴졌다.

_생각을 하고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은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일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전시장 곳곳마다 적혀진 브레송의 이미지에 관한 언변들이 어쩐지 보는이에게 이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감상을 하는 것이 더 생각 없는 일처럼 느껴지게 압박을 하다.

_개념과 논리가 머리를 가득채웠을 사회학자의 시선이라기엔 너무나 괜찮은 시선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사진전을 하고 싶어 멋진 사회학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어떤 멋진 외도를 할 수 있는 전문가라니.

_대림미술관 옆 경북궁으로 걸어가니 수문장교대식을 하다. 장마의 비그친 고궁이 선선하니 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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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2 00:11 2005/07/02 00:11

찰나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찰나의 거장`전
2005. 5. 21(토) - 2005. 7. 17(일)
전시없는날 : 2005/5/30 (월) 2005/6/27 (월)
예술의 전당 디자인미술관

_시선시선에 사람에 대한 caring이 넘치는 것이 보인다.
사람이 슬프면 시선도 외롭고
사람이 쓸쓸하면 시선도 우울하고
사람이 고뇌하면 시선도 무겁다.

_여행에 대한 동경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신선한 시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렇게도 많이 긴 길을 돌아다녔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한 곳에 침잠하지 않고 계속 스스로에게 새로운 무엇을 주입하는 것, 중요한 것.

_그의 작품 중에서는 그닥 많이 보지 못했었던 portraits. 프로이트, 샤갈, 에른스트, 사르트르, 뒤샹, 피카소, 그들의 사진을 너무나 그들스럽게 찍어놓았다. 그 중에서, 까뮈, 그의 트렌치 코트와 말아서 문 담배, 그리고 눈빛, 눈빛, 내게 있어 오늘의 베스트 컷.

_현대사에 관련한 사진들을 걸어놓은 벽에 '코리아 헤럴드'를 발라놓은 것이라던가 성의 없는 네임택-어떤 사진은 택이 없고, 어떤 사진의 설명엔 '뭐뭐가 뭐뭐하고 있다'라고 어이 없게 그렇게 써놓은-이라던가 올림푸스의 사진 콘테스트라던가, 사진은 좋은데, 뭔가 돈 이벤트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그게 옥의 티라면 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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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4 23:00 2005/06/04 23:00

Bruce Davidson



_근 1년 반만에 압구정에 가본 것 같다. 돈이 넘치고, 아름다운 여자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리고 갤러리들은 넘치는 돈과 여자 사이사이에 박혀 있었다. 예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_놀랐던 것들; 플래시를 제멋대로 터뜨렸음에도 아직 퉁퉁 튕기는 색깔들, 보는 이를 한 번 휘청하게 하는 그 휘감아 들어가는 듯한 구도(어떤 렌즈일까?). 그리고 현실 속의 단 한 번뿐인 모습, 그저 흘려버릴수도, 이렇게 남길 수도 있는, 리얼리즘이 던져주는 아찔한 순간성.



Subway (women in summer dresses on platform), 1980
C-print on Fuji Crystal Archive paper; printed 2005, 20 x 30 inches
Copyright Bruce Davidson/Magnum Photos, Courtesy Howard Greenberg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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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8 01:28 2005/03/18 01:28

YES, YOKO

무뇌아가 되어가는지,
미술관을 갔다와도 남는 생각이 하나도 없지만.
오노 요코전, 로댕갤러리.

다분히 전체적으로 개념미술 적이었는데, 그런 것은 오랜만에 대하는 듯 했다. 어떤 식이냐면, 투명한 아크릴 판은 저녁 햇살을 담는 회화이고, 뭐, 그런 식이다. 그런 작업들은 퍽이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를 생각나게 했음.

여기에 전시된 개념미술 뿐만 아니라 이러저러한 퍼포먼스나 이벤트도 많았는데, 참 6,70년대에 많았던 일이었을라나.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 뒤집어보기' 예술은 그다지 그때만큼 임팩트를 주진 못하는 것 같다. 지금은 워낙에 그냥 있어도 뒤집어진 생각들이 많아서. 좀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생각들이 많아서. 허.

뭐 그런 형식이 이야기는 차치하고 그냥, 오노씨의 여러 작업들을 보면,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을 보는 인식 틀에서 벗어나 그렇게 소소한 것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마음이 따뜻할까.

하지만 딱히 어떤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작품은 없었던 듯.
하긴, 그런 작업이 남는건 그저 개념 뿐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래도, 그 비슷한 시기에 아방가르드에 몸바쳤던 백씨 아저씨는 참 멋졌는데. 개념도 잔뜩이었지만 아름답기도 했었다구.

뭐 어쨌든, 갔다오면 생활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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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12 00:34 2003/07/12 0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