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의 개


황천의 개
후지와라 신야

_사진가이자 여행가인 그가 95년과 96년에 오옴진리교 사건과 그의 과거 여행 경험을 비교하며 신문에 연재한 글들.

_그가 이십대 초반 예술대학을 중퇴하고 인도로 떠난 이유는 그 자신의 몸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정말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성, 리얼리티를 원했고, 그것은 인도에서 시체를 뜯어먹던 개들에게 둘러싸여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그 때에야 정말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_말하자면 이 기호와 가상이 현실을 깡그리 뒤덮는 도시라는 곳에서는 점점 그 '리얼'이라는 것이 희미해지고 지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동물이 살아왔던 수만년 동안은 기후, 환경, 동료 모두가 어떤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었고, 그 위험들 안에서 '고통'이라는 것은 너무나 흔했던 것이며, 때문에 나라는 존재, 또는 그저 나라는 고깃덩어리는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더도 덜도 아닌 그저 고깃덩어리, 스스로를 먹여살려야 하는 고깃덩어리-이라는 것이다.

_우리는 육체적 고통이 있을 때에야 신체가 존재를 다시금 깨닫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안전하고 그 어떤 위험이나 위협으로부터 보호된 이 도시의 삶에서 그런 리얼리티는 너무나 쉽게 빛을 잃는다. 물리적 위험이 사라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 신체를 대상화한다. 신체는 관리의 대상이 되고 보살핌의 대상이 된다. 신체는 '나'를 싣고 다니는 어떤 기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그리고 이미 정신적인 존재성이 증발해버린 도시적 삶에서 육체적 존재성마저 지워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떤 완벽한 존재의 소거, 가 아닐까 한다.

_그러한 '리얼리티의 희석'에 고통스러워 했던 것은 이십대의 후지와라 신야나 오옴진리교의 신도들이나 같았을 것이라고 하며, 그 둘 모두 어떤 해답을 찾아 인도로 떠났다. '종교'라는 이념에 전염되기를 극도로 꺼려했던 저자는 종교 없이도 어떤 현현epiphany를 겪었지만, 오옴진리교에서는 힌두교의 키치들만 잔뜩 담아오게 된다.

_그가 70년대 인도에서 목격했던 것은 실패한 68세대의 (또는 전공투 세대의) 막연한 도피였다. 좌파라는 유물론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도에서 그들의 정신적 세계를 끝도 없이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공중 부양과 같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어떤 물질성을 바란다. 후지와라 신야는 그 점에 대해, 정신성과 물질성의 부조화가 가져오는 파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_사족으로, 세상의 가상성, 또는 실재성을 인지하는 다른 층위들;
하나, 후지와라 신야는 인도에서 시체 태우는 곳을 2주 동안 꼬박 구경했다. 그리고 시체를 뜯어먹던 개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낀 뒤에야 어떤 실체성, 실재성을 찾았다.
둘, 일전에 내가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을 사흘간 지프를 타고 돌아다닌 뒤, 칠레로 넘어가는 길에 몇 일만에 처음 만나는 '포장도로'가 나오자 나와 다른 여행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 길로 열 두 시간 넘게 쉬지않고 달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라는 대도시에 도착하고 난 뒤에야 나는 어떤 평온함을 되찾았다.
셋, 올 여름 친구들과 한 계곡에 놀러갔을 때, 이제 열아홉살인 한 동생은 그곳이 마치 내추럴 '워터파크'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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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7 03:52 2009/10/07 03:52

동양기행

 
동양기행
후지와라 신야


"'흑해의 물은 검다'라고 누군가에게 전보라도 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어느 먼 곳에서 이런 내용이 적힌 전보를 받아본 사람은 이 쓸데없는 전문을 통해 비밀스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뭔가 색다를 탐험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흑해의 물은 검다, 라고 알려줬을 뿐이다."

_요즘에 서점에 쏟아지는 여행기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맛집멋집의 해외판인 것처럼, 현지의 다양한 재미들을 소개한 내용을 위주로 간간이 뻔한 여행 에피소드들이 섞여있는 준-가이드북(또는 화보집)들과, 다른 하나는 '여행의 서정' 또는 '나를 찾아가는 여행'처럼, 그저 찌질했을 뿐인 시간들을 훗날에야 멋드러진 감정들로 떡칠한, 너저분한 감정의 배설들.

_후지와라 신야의 글과 사진은, 어느 서평처럼, '즉물적'이다.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일 년을 넘게 터키에서 일본까지 향한 여정에는, 요즘의 트렌디 트래블러들처럼 자신을 여정에 투사하지 않는다. 마치 적외선과 가시광선이 똑 같은 빛의 종류들인 것처럼, 그에게 있어서 삶의 무늬들과 경험들은 그저 그대로 거기 있을 뿐이다.

"이렇게 부드러운 육질은 먹어본 적이 없다. 양의 동공을 맛있게 느끼는 혓바닥에 굴욕과 비슷한 감정이 쌓인다."

"바람이 불고, 거리는 냄새를 풍긴다.
거리에서는 정액 냄새가 난다.
방출되어 부패되고, 지면에 스며들고, 벽에 들러붙은 사람들의 땀, 숨, 기름, 배기가스...... 녹슨 쇠의 냄새, 불에 탄 돼지, 양의 날고기, 코를 찌르는 향신료, 잘 익은 파파야의 감미로운 냄새, 식당이 내뿜은 코코넛 오일의 탄내, 제단의 향연, 열대 여성의 화장, 남자들의 머리에서 풍기는 겨자 기름, 재스민 냄새, 썩은 강, 기름기, 대마초 연기, 가로수...... 대낮의 태양이 남긴 냄새...... 그리고 비의 냄새."

_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적인 감각의 중첩인, 그러한 '즉물성'은, 일종의 새로운 form으로, 싸구려 감정을 걸치기 힘든 어떤 무게있는 것으로, 아니, 오히려 쉽게 의식의 이해를 허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쫓아가고 싶은 어떤 '세상의 진실'처럼 다가온다. 그것이 때로는 이 보통 사람의 사회화된 의식을 굉장히 역하게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론 그 휘향찬란함에 넋이 빠진다.

_그리고 그러한 성취(?)는 이렇게 시지프스의 팔 근육처럼 기나긴 여정의 무딤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여 그 즉물성의 뒤안은 어딘가 모르게 서늘하다.

"예전에 표고 4000미터의 티베트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두 번 다시 저 푸르디 푸르른 하늘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상에 내려온 뒤에도 그때의 확신은 변하지 않았다. 어느 지역을 여행하든 하늘이 탁하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티베트의 아름다운 하늘은 내 눈동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을 심어주었다. 그 얼룩 때문에 하늘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뒤로는 여행길에 마주치는 것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눈앞의 길조가 언제 악몽으로 뒤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훗날 악몽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는 동공을 흐릿하게 만들고, 감수성을 미련하게 해두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긴 세월 동안 쉬지 않고 여행할 수 있었던 나만의 비결이었다.

그러나 보여지는 것까지 막아낼 도리는 없다."

_'그저 이렇게 존재할 뿐인 세상'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 때문에' 불쑥불쑥 동요하는 감정의 너울 사이의 고요한 전쟁.

- 그의 다른 책 <황천의 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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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8 19:31 2009/09/28 1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