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 Christmas

이교도의 명절을 비난만 하던 요 몇 일이지만, 그래도 다 가기 전에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 인사, 신년 인사 같이 진부하고 매 년 똑같은 반복도 없지만, 그래도 어떤 반복의 방점을 찍는 것에는 어떤 성스러움이 있다. 메리 크리스마스.

leaf

2011/12/25 21:47 2011/12/25 21:47

mortal

일주일 내내 나를 짓누르던 그것, 마치 나는 북극의 바다에 있고 머리 위에 커다란 얼음반을 이고 있는 것 같았지, 해가 떠도 어둠이 깔려도 그 무겁고 차가운 고체의 느낌은 가시지가 않았어,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호흡을 할 수 없었고. 그건 마치 진실을 폭로하는 것 같았어, 암흑 물질 같은 그것이 선반 아래, 옷장 속에, 칼 끝에,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 음흉한 진실을 목도한 이상 세계는 더 이상 예전같을 수 없었지, 그저 저음의 불안만이 두개골 속을 윙윙댔어. 어찌 반응해야 할까? 기억이 완전히 일단락 지어지는 기분, 기억이 그대로 고체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 한 순간에 화석화가 되던 여러 순간들, 표정들. 그러고나니 밥을 먹고 비타민C를 넘기는 생을 지속시키려는 그 자잘하고도 숱한 노력들은 모두 거추장스러울 뿐 아니라, 이윽고 그 행위들에 어떤 경멸마저 갖게 되는 것이지; 지속, 유지, 재생 같은 것들은 모두 허구의 개념이지, 왜냐하면 지나간 모든 것들은 한 번 뿐인 것들이고, 한 번 뿐인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도 같기 때문이지. 그렇게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연기의 밀도조차 갖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 순간,

그 순간에 오히려 자유를 보았고. 死者와 대화조차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leaf

2011/12/09 00:01 2011/12/09 00:01

지도와 영토

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이따금씩 어쩌면 예술이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동물적이라 할, 순수하고 즐거운 활동. '진짜 화가처럼 야수적' '그는 새가 노래하듯 그림을 그린다' 같은 말들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일단 죽음의 문제를 초월하고 나면 예술이란 이렇게 돼버리는 것이 아닐까."

"예술가라는 것, 그것은 그에게 무엇보다도 순응하는 누군가가 되는 것이었다. 예측 불허의 불가해한 메시지에 순응하는 것. 모든 종류의 종교적 믿음을 제외한다면 부득불 직관이라는 말로밖에 칭할 수 없는 이 메시지는, 삶의 모든 원칙과 자존심을 잃지 않고는 빠져나갈 방도가 전혀 없는 단호하고도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이 메시지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로 방향을 틀기 위해 한 작품을, 아니 나아가 한 시기의 작품 전체를 모조리 파괴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때로는 심지어 아무런 노선도, 대책도, 기약도 없이 작품을 파괴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고 오직 이런 점 때문에 예술가의 처지가 '어렵다'고 할 수 있는 것이리라."

"사실 난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연대감이 아주 희박하오……."

"삶은 때로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만, 너무 비겁하거나 우유부단해서 그 기회를 덥석 움켜잡지 못하면 이내 거두어가버린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행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순간이. 그 순간은 며칠 동안, 때로는 몇 주 혹은 몇 달 이상 지속된다. 대신 인생에 정말 단 한 번, 꼭 한 번뿐이다. 나중에 아무리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려 해도 불가능하다. 더이상 열정과 신뢰와 믿음을 위한 자리는 없고, 희미한 체념과 서로를 향한 서글픈 연민과 뭔가 일어날 수도 있었으리라는 적확하고 무의미한 감정만이 남을 뿐, 우리에게 주어졌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만 증명한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엘벡은 소설가로서의 이력을 반추하며 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늘 메모하고 문장들을 늘어놓아볼 수는 있지만, 소설을 쓰려면 이 모든 것이 촘촘해지고 노니박의 여지가 없게 될 때까지, 필연이라는 진정한 핵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서 소설은 절대 소설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책은 굳기를 스스로 결정하는 콘크리트 블록과도 같아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거기 그렇게 존재하며 무기력한 번민 속에서 책이 저절로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1889년 에든버러 컨퍼런스에서 (윌리엄 모리스가) 한 연설이요. -요컨대 이것이 예술가로서의 우리 입장입니다. 우리는 상업적 생산 시스템에 치명적 타격을 입은 수공업의 마지막 대표자들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 위에 올라서 있었고, 개 역시 인간에게 길들여진 이래로 자연 위에 올라섰다는 것이 그의 깊은 속내였다. 비록 그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화장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불경스럽게 여겨졌다."


_게으른 내가 모든 저작을 읽은 작가는 우엘벡 뿐이다. <소립자>와 <어느 섬의 가능성>은 속편이라 할 정도로 관통하는 것이 있었고, <플랫폼>과 <투쟁 영역의 확장>은 앞의 두 소설에서 나오는 중요 테마를 확장한 것 같은 외전 같은 책이었는데, 이 책은 앞 책들의 흐름을 뒤트는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혼란스럽게 한다. 이 혼란스럽다는 것이, 단순히 한 작가의 문학적 노선의 혼선이 헷갈리는 정도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세계관은 어느 새인가 내가, 세상을 보는 시선의 로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_어떠한 평론도 이 책을 정확하고 통합되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들 지금까지 우엘벡이 열거했던 많은 주제들을 한꺼번에 녹였다고만 하지, 전체가, 아니면 각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제대로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책에 같이 실려있는 역자의 평론으론 세상에 대한 우엘벡의 시선이 '따뜻해졌다'라고 하지만, 그건 또 전혀 아닌 것 같다.

_인류에 대한 동질감이나 희망을 별로 갖지 못하고 있는 그가, 현존 인류를 포기하고 새로운 신인류를 가정하는  <어느 섬의 가능성>과 같은 세계관, 이 나는 이 소설에서도 다시 나타날 줄 알았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며 끝을 달려갈수록 나는 어떤 파괴적인 변화를 기대했던 것이 사실인데, 끝은, 어떤 대단한 격변 없이 인류는 또다른 번영을 구가하는 것으로 끝난다.

_우엘벡이 과거의 소설에서 말해왔던 인류의 마지막 또는 희망 없음에 대한 맥락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아버지의 안락사에 대한 스스로의 결정, 소설 속 우엘벡을 죽인 외과의가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시도했던 갖가지 인간형상들(책에서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굉장히 단촐하게 하고 있지만 이것이 전해주는 의미는 그의 전작들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테마에 대한 상징 중 간접적인 것들로는, 소설 속 우엘벡이 아일랜드에서 살던 몰골의 모습, 또는 주인공 제드가 노년에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사는 것 등일 것이다.

_전작의 소설들에서 새로운 인류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실험을 거쳐 급기야 그 많은 단점을 지닌 현존 인류를 포기하고 신인류로 재탄생(또는 멸종)하는 것에 성공한다는 내용들이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또는 절망)'이라는 모습으로 나왔다면, 이 소설에서는 그런 시도는 한 외과의가 지하실에서 자기 맘대로 키메라들을 만드는 한 싸이코패스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그 외과의는 소설 속의 미셸 우엘벡(그렇게 인간의 마지막에 대한글을 써왔던)을 완전한 난도질 끝에 죽이는 것으로 나온다. 이것만으로 작가가 과거의 노선에서 큰 선회를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_인류의 종말이라는 테마를 포기한 작가가 그리는 미래란 어찌보면 유토피아적이다. 20세기 초의 금융 딸꾹질은 그냥 잠깐의 우려로 그치고, 도시가 농촌으로 전파되는 현대적 현상 아래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는 모습이다.

_결국에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주인공 제드가 노년에 하던 작업들의 테마일텐데, 전자 기판들에 황산을 서서히 부으며 녹는 모습을 조용한 숲의 모습에 겹쳐 보여 준 작품들은 분명 모든 것이 소멸할 것이라는, 공空 사상에 가까운 무엇일 것이다. 이는 서양 회화의 바니타스적 이미지들과는 다른, 좀 더 불교적인 어떤 것이다. 인류의 영속을 부정하면서도 현대의 모습의 지속을 용인했다는 점은, 나로서는 굉장히 무책임하면서도 대중 야합적인 세계관으로도 보여진다. 소설 속 우엘벡은 아일랜드에서 괴물 같은 몰골로 지내다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개도 기르고 건강도 되찾고 '사람이 사는 것처럼 살게' 된다. 그 또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사소한 애정과 caring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려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괴퍅함인지는 몰라도 그런 행복한 삶을 구가하는 자신을 갈기갈기 난도질을 하여 살해당하도록 만든다.

_새로운 인류가 나타나리라는 것도 unlikely하지만, 우엘벡이 인간의 애정 속에서 이상 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것도 unlikely하다.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공쿠르상 수상을 위한(수상했다) 꼼수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 보면서, 그러면서도 책의 후반 제드가 만든 작품들을 묘사한 글을 읽으며 그의 작품들을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왜인지 제대로 설명할 순 없지만 꽤나 마음을 편하게 한다.


_지금 카페가 닫는 시간인지라 미처 쓰지  못한 테마들; 그가 도시에 대비되는 시골을 바라보는 관점, glocalization과 계속되는 '토착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 그건 왜였을까?

그리고, 윌리엄 모리스와 제드의 아버지가 그렸던 건물들의 청사진들, 그리고 우엘벡이 고향으로 이사 오고 나서 썼던 글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끝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살해당하기 전까지 썼던 글들. 아마도 자본주의와 산업시대가 아닌 새로운 삶의 체계에 대한 구상이었던 것 같은데, 윌리엄 모리스를 비롯하여 20세기 초에 실패한 이 '시도들의 시도'에 대한 언급들은 계속해서 나오다가, 결국 어떠한 확연한 결과 없이 소설은 끝난다.

이 윌리엄 모리스와 토착적 삶을 통해서 그가 흔치 않게 중요한 무엇으로 강조했던 것이라면, 직업의 소명 의식, 나의 식으로 풀자면 어떤 craftmanship이다. 우엘벡은 이것만이 이윤을 삶의 동기로 삼는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라고 (흘려가며) 언급하고 있으며, 책 마지막의 미래의 모습(2040~50경이다)에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또한 나름의 삶을 구축하고는 생이 flourish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때엔, 그가 정확히 인간 사회의 체제가 어떤 식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아도, 삶은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으로' 지속되었다고 말해주고 있고, 그것은 아마도 이 craftmanship에서 나왔을 공산이 크다.

_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년의 제드의 작품들이 모두 oblivion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 복선을 보면, 우엘벡의 떨칠 수 없는 염세성, 이 느껴지기도하고.

leaf

2011/10/25 22:50 2011/10/25 22:50

« Previous : 1 : 2 : 3 : 4 : 5 : ... 339 : Next »